
책 읽자고
by seoma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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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전체로 보면 유럽중심사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문제라면, 그 시각을 아시아로 옮겨가면 중국중심의 역사관에서 탈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시아는 원나라 등장이전에는 다원주의 문명 체제였다.
책에서 말하는 북방유목민들이 만든 북방문명 고구려를 비롯한 발해 - 고려로 이어지는 동방문명, 남방문명과 서방문명이 존재했고 중국문명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물론 원 출현이전 계속 그랬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시아의 중심은 중국이 아니었다. 중국이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중국의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 중국이 위대해서라거나 중국이란 국가가 특별히 강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이 블랙홀도 아니고 중국주위에 있는 민족이 다 그쪽으로 빨려들어갔겠는가….
이 책은 초기 유라시아 유목민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고학과 문헌을 두루 검토하고 그에 따라 결론을 내린 전문서적으로 읽기가 수월친 않다.
멍청한 프랑스의 두 분께서 추상화하고 유목민의 하나의 속성을 가지고 확대해석, 상상의 나래를 펼쳐 만든 이상한 책의 일부 내용 때문에 노마드=자유 라는 궤변이 성립되었고, 그들의 추종자들도 멍청한 생각들을 하는데 실제 역사상의 유목민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역사상 존재했던 실제 유목민과 상상의 유목민을 헷갈려 하지 말았으면 한다.)
책의 원제는 《Ancient China and Its Enemies: The Rise of Nomadic Power in East Asian History》이다. 책을 다 읽어보면 느끼겠지만, 사실 이 책은 북방민족에 대응한 중국의 정책을 중심내용으로 다루었지 저자가 서문에 밝히듯이 '중국 북방의 역사를 문화사의 수준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는 아니었다.
잠깐 차례를 보면, 1부는 유리시아 유목민의 유물과 유적을 살펴보았고 2부는 흉노이전 유목민에 대한 중국의 정책 3부는 흉노의 출현과 그에 따른 한나라의 정책변화 4부는 사마천의 사기를 중심으로 북방민족서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유목민이라고 하면 위에서도 말했듯이 푸른 언덕에서 말들이 뛰어다니고 어떠한 정해진 길도 필요치 않고 철에 따라 이동하는 그런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초기 유목민들의 유적을 보면 반농 반유목, 즉 목축과 농경이 공존하는 사회였다. 수레도 사용하였다. (수레를 사용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 것이다.) 통합되지 않는 이상은 수 많은 소규모 공동체들이 있었고 분쟁이 있고 (분쟁이 있었으니 당연히)계급도 있었다. 당연히 자기들만의 경계도 존재했다. 정주국가처럼 어떤 경계를 지어놓은 것은 아니었지만, 흉노족은 각자의 몫으로 토지도 소유했다.(352쪽). 즉, 지가 가고 싶은 대로 막 돌아다니는 게 유목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은 유목민이 정주국가를 공격한 이유가 단순히 만성적인 먹거리 부족문제가 아니라는(231쪽)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책의 문제는 과연 이 책에서 말한 북방민족의 역사를 문화사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를 하였냐라는 것이다. 1부에서 다룬 고고학적 성과에 기초한 분석은 충분히 그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2부부터 4부까지 대체 무슨 근거로 이 책에서 북방민족의 역사를 문화사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2부의 내용은 단 한줄로 정리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각 나라들의 정책들은 도덕적 관념이라는 탈을 썼으나 사실은 팽창주의에 입각한 실용주의 정책이었다.'라는 것이다. 북방민족에 대한 이야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어떻게 생각했고 그들에 대해 각 나라들이 어떻게 대처를 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3부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흉노의 등장 그리고 초기 유화정책에서 적대정책으로 바꾼 이유에 대한 설명이었지 북방민족에 대해 특이할 만한 서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4부에 들어 사마천 이전까지 막연하게 취급했던 북방민족들을 사마천이 실질적인 중국의 역사적 전통 속에 통합시켰다(384쪽)라는 내용이 전부였다. 물론 책 자체로 보면 훌륭한다. 고고학 자료와 문헌 자료를 두루 살피면서 서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했던 북방문명이라든가 북방민족의 문화사라든가 하는 느낌의 서술은 어디에도 비치지 않았다. 서술의 중심축은 항상 중국측에 있었지 북방민족에 있지 않았다. 자료가 중국것의 자료였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중국측 자료를 가지고도 북방민족의 측면에서 서술은 가능했을 것이다. 저자가 북방민족에 대해 대한 태도는 여전히 중국의 변방이었다.
저자가 의도했던 것을 과연 이 책에서 얼마나 반영했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30%정도라고 밖에는 충족시키지 못했다라고 말하고 싶다. 오히려 중국과 초기 유목민족과의 관계에서 어떤 생각으로 정책을 펼쳤는지가 중심내용이라고 하면 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저자의 의도와 사실상 책을 펼쳐들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나오는 내용과 일치하느냐라고 물어본다면 결코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책이었다 라고 평할 수 밖에는 없었던 책이었다.
2009년 8월 28일
플라톤이 생각하는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적은 책이 그의 '국가론'이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란 무엇일까? 플라톤은 정치체제를 다섯으로 분류한다. 귀족체제 → 명예체제 → 과두체제 → 민주체제 → 참주체제 그리고 귀족체제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체제는 잘못된 정치체제라고 설파한다. 귀족, 그리고 그 귀족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철학자란 (플라톤이 말한 바로는)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책은 번역자가 직역이 아닌 의역을 많이 했기 때문에 원저와 얼마나 많이 차이 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의역을 잘하여 어설픈 직역보다 읽기에는 훨씬 수월했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비유를 많이 사용한다. 석가, 예수가 어떤 설명을 할 때 비유를 많이 사용한 것처럼…. 2500년전 위대한 철학자가 하신 이야기에 감히 내가 토를 달 수 없겠지만, 몇 가지 말을 하자면 비유가 무척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예를 하나 적어보면 「국가 체제란 스파르타식의 명예 체제 …(생략) 이러한 체제는 그 나라 국민의 습성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 옮을 걸세, 그러므로 국가의 체제에 다섯 가지가 있다면 인간의 유형도 그와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데…(225쪽)」 국가체제에 따라 인간의 유형도 그와 같다면, 조선의 민중은 노예적 성향이 있기 때문에 선조 같은 군주가 다스리는 국가가 되었다는 것인가, 노예적 성향 때문에 식민지라는 체제가 되었다는 것인가?
이런 식의 논리적 비약이 심한 것을 몇몇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민주 체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유가 질서를 위협해 혼혈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인처럼 동등해지지.(237쪽)」라고 하거나 「나는 야만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것과, …(생략)… 신께 감사한다.(부록 - 289쪽)」이라는 등의 그리스 우월주의를 보여주는 구절도 있고, 「수호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손이 태어났을 경우 그 자손을 일반 집단으로 보내고, 일반 집단에서 태어난 자손이 우수하면 수호자 집단으로 보내야 한다는 걸세.(119쪽)」 「우수한 자는 우수한 자끼리 관계를 맺게 하고 열등한 자는 열등한 자끼리 관계 맺게 하자는 것이 …(152쪽)」 「아이들이 우성인지 열성인지 판가름해 잘못 태어난 아이들은 별도의 시설에 은밀히 조치하는 역할도 해야하네.(153-154쪽)」등의 우생학적 시각을 가진 구절도 있으며,
국가의 수호자(통치자)를 거론할 때 「이러한 통치자는 여자들도 될 수 있네.(220쪽)」 「여자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일을 못할 수는 없네. 자연의 천성은 남녀 간에 동일하니까(149족)」라며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훌륭한 수호자라면 상대가 젊었건 늙었건 여자들을 모방해선 안되네.(89쪽)」 「전쟁이나 기타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젊은이에겐 명예나 보수뿐만 아니라 여자와 자주 동침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 하네.(153쪽)」 「부인을 소유하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문제 등에 있어 '친구의 것은 나누어 갖는다.'라는 격언대로 하기만 한다면 말일세.(120쪽)」 세번째의 것은 공산주의 사상과 관계 있다고도 말하는데, 그것보다 나는 부인을 공유한다는 말에 중심을 두고 싶다. 즉, 공유하는 주체는 남성이고 객체는 여성이라는 것이므로 이 말은 지극히 남성 우월주의 발언이라는 것이다. 즉, 남녀 평등을 말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남성우월주의를 나타내어 읽는 독자를 기만하는 것을 모습을 보여주는 등 자신이 말한 주장에 대한 모순을 자주 보여준다. 단지 고전이라는 것 빼고는 이 책에서 도대체 뭘 배울 수 있을까.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고 고려한다고 해도 역시 2500년 전 사람의 사상은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2009년 08년 21일
책을 산 지 4년 만에 읽었다. 저자이신 김태훈 씨의 강의가 있다고 해서 산 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때 사서 전시용으로 놔두다가 이번에 생각이 나서 읽게 되었다. 충무공 이순신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구국의 영웅? 박정희가 부각시킨 조작된 영웅? 이유야 어떻간에 우리나라에서 세종대왕, 유관순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부분이 충무공 이순신이 아닐까 한다.
평소 조선이라는 옛 나라를 굉장히 싫어하는지라 관심이 없어, 애석하게도 충무공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단지 박정희가 부각시켜 만들어진 영웅이라는 이미지만 나에게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10년도 더 이전인 고2. 당시 환단고기에 심취해 있던 나에게 정용석의 《중원》이라는 책은 충무공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지금 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책이지만, 고1 때까지 열국지, 초한지, 삼국지, 수호지에 빠져 살았던 나에게 고2 때 접한 환단고기의 충격은 내 정신세계를 송두리째 뒤집어엎어버릴 정도의 심했고, 그 가운데 사서 읽었던 정용석의 《중원》이라는 책은 내게 심히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그 안에 서술되어 있던 임진왜란에 대한 (지금 보면 어처구니없는 소설과도 같은 유치찬란한) 서술이 그때는 가장 크게 뇌리에 박혀 20대 후반까지 이어져 왔던 것 같다.
저자이신 김태훈 씨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평범한 직장인인데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해 깊이 빠져 몇 년간 시간 나는 대로 사서를 뒤지면서 이 책을 완성했다고 한다.
역사학자가 되지 못한 나에게 저자는 그야말로 내가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롤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통해 성웅 이순신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이순신'을 밝히는 작업을 했다고 하였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보기에는 반은 성공하고 반은 실패한 것 같다. 우선 많은 사서를 인용하여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것은 좋았다. 하지만, 저자도 한국인인지라 이순신이라는 거대한 그림자를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중간 중간 '역시 이순신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등의 (노래로 말하자면) 추임새 같은 것을 집어넣었고, 한산대첩이나 백의종군 후 다시 지휘권을 잡고 출전했던 명랑해전 등을 서술할 때는 그의 격한 감정이 읽는 독자에게도 전해질 정도로 이성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700여 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어 적어본다. 전쟁 막바지였던 1598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군이 전면 철수를 진행하고 있을 무렵 그 소식을 듣고 선조가 남쪽으로 내려가 군사와 백성의 사기를 높여주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때 사관이 《선조실록》에 적은 말은 기가 막히다. 「임진왜란 때는 흉봉이 경기도 내에 이르지 않아서 임금의 수레가 이미 서쪽으로 파천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왜적이 겨우 남쪽 변방에 이르자 내전이 먼저 황해도로 옮겨 갔다. 7년 동안 행한 모든 것이 움츠려 구차하게 보전하려는 계책이었고, 쇄신 분발하여 적을 섬멸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리를 진작시키지 않았으니 지금 비록 남쪽으로 내려가겠다는 하교가 있지만, 신은 믿어지지 않는다.(597쪽)」
전쟁 중에 임금이 한 모든 일이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하려는 것 뿐이었다는 이 말이 과연 사관만의 생각이었을까? 아마 조선에 사는 모든 백성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정신질환자가 왕으로 앉아있었고, 내당이 옳다 니당은 그르다 하는 정신병자들이 관리라고 앉아있었으니 나라가 잘될 턱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700쪽이나 되는 책을 이틀 반 만에 읽었다. 이렇게 빨리 읽은 것은 이번에 처음이다. 그 정도로 이 책은 흥미진진하였다.
그리고 책에 등장하는 선조와 그 대신들을 보면서 오늘날 한국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2009년 08월 19일

오랜만에 책을 한 권 읽었다.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듣도보도 못한 '미네르바'라는 녀석이 추천한 책이라고 해서 갑자기 인기도서가 되었다. (4,500만 국민 중에 과연 그 사람이 구속되기 전까지 그 사람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한낱 쓰레기더미(다음 아고라)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다고 쓰레기더미에다 미사일을 쏘다니 우리나라 관료들의 멍청한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우선 이 책의 작가에 대해 알아야 할 것 같다. 작가의 성함은 '리오 휴버먼(1903-1968)'. 미국 사람이고, 유명한 폴 스위지와 《Monthly Review》라는 좌파성향의 잡지를 창간하셨다고 한다.
책의 원제는 《Man's Worldly Goods - The Story of the Wealth of Nation(인간의 세속의 부 - 국부이야기》인데, 번역자가 알기 쉬운 제목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936년에 쓴 책이니 약 70년 전 책이다. 20세기 중반도 채 되지 않은 책이 지금까지 판매되고 있다는 것은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는지...(안타깝게도 나는 특별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쓰레기더미에 있던 똥파리가 추천했다고 해도 책이 재미가 없으면 팔리지 않는다. 재미가 있으니 책이 많이 팔리는 것이다. 특히 작가가 좌파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현 시류와 어느 정도 맞기 때문에 더 탄력이 붙은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에서 특별히 새로운 것은 느끼지 못했다. 중세 유럽부터 책을 쓴 20세기 초반까지의 경제사를 쓴 것뿐이다. 경제사를 처음 접하거나 유럽에 대해 관심 있는 초보자라고 한다면 흥미롭게 읽겠지만, 유럽에 관심도 없고 경제사도 아는 사람이라면 특별한 점은 찾지 못할 것 같다. 저자도 책 첫 부분에 1)경제 이론으로 역사를 설명하고 2)역사로 경제 이론을 설명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단 하나,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은 제목이다. 원제인 《인간의 세속의 부》라든가 쉽게 고쳤다고 한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라든가 하는 것은 경제사=유럽경제사 라는 해괴망측한 논리를 대중들에게 심어줄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책 제목은 잘못 지은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저자가 20세기 초 사람이라는 것을 고려해서 너그럽게 넘어가 주자.
쉬울 것 같지만, 결코 쉽지 않은 주제를 쉽게 잘 쓴 작가나 번역을 매끄럽게 잘한 번역자 덕분에 책의 가치가 더 올라가는 것 같다.
2009년 8월 16일
■ 불교의 중국전래 ■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때: 약 1세기경 ·감몽구법설(感夢求法說): 한 명제(明帝, 재위58-75)때 황제가 꿈을 꾸고 法을 구했다는 것 : 불교와 중국 전통 종교(유교, 도교)와의 갈등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 노자가 서쪽으로 가서 오랑캐(인도)를 교화한 것이 다시 중국으로 들어온 것 전래(1세기경) → 조금씩 싹 틈(3,4세기 남북조시대)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가 됨(5,6세기 수당시대) ·불교 경전을 한역(漢譯) ·초기: 안식국(安息國) 태자 안세고(安世高)가 148년 낙양에 도착 대월지국(大月之國) 지루가참(支婁迦讖)이 168년 낙양에 도착 ·격의불교(格義佛敎): 불교용어를 도교용어로 끼워맞춤 ·도안(道安, 312-385): 중국불교의 기초를 다짐. 「반야경」계통의 경전을 연구 번역 ·구마라지바(鳩摩羅什, 344-413): 불경 번역에 한 획을 그은 인물
■ 중국불교의 종파 ■ ●삼론종(三論宗)● ·「중론」「십이문론」「백론」을 기본경전으로 함 ·초조(初祖): 승랑(僧朗, 450-530) - 전성기: 길장(吉藏, 549-623) ·천태종에 흡수, 천태사상의 이론적 기초 제공 ●유식종(唯識宗)● ·오직(唯) 의식(識)일 뿐: 法의 相을 중시 ⇒ 법상종(法相宗)이라고도 함 ·현장(玄裝, 596-664): 인도 유가학파의 가르침을 배우고 귀국 ·초조(初祖): 규기(窺基, 632-682) ●천태종(天台宗)● ·중심사상: 교판, 공가중 삼제, 일념삼천, 지관 ·초조(初祖): 혜문(慧文, 약550년) - 2대: 혜사(慧思, 515-577) - 3대:지의(智顗, 538-597) ·지의(智顗): 실질적 창시자, 지자대사(智者大師)라고도 함 ·「법화경(法華經)」을 중심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법화종’이라고도 함 ·교판사상(敎判思想): 교상판석(敎相判釋)의 준말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 들어와 혼란을 겪다가 생각해 낸 것이 교판 ·대표적 교판이론: 천태 교판인 ‘오시팔교’ ·오시(五時) 1)화엄시(華嚴時): 부처님이 성불하신 직후 21일간 ⇒ 「화엄경」에 있는 가르침 ⇒ 너무 심오하여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함 2)아함시(阿含時, 12년): 가르침의 수준을 낮춰 알아듣기 쉽게 하심 ⇒ 「아함경」에 있는 가르침 녹야원에서 다섯 친구들을 가르친 것과 같은 종류라 하여 ‘녹야원시’ 더 높은 가르침을 위한 준비단계라 하여 ‘유인시(誘引時)’ 3)방등시(方等時, 8년): 한 단계 위 가르침, 초기 대승의 가르침 ⇒ 「유마경」「능가경」「승만경」등 상좌불교의 가르침에 집착하는 아라한들의 잘못된 생각을 꾸짖기도 했다하여 ‘탄아시(彈●時)’ 4)반야시(般若時, 22년): 발달한 대승사상의 가르침 ⇒「반야경」 이 가르침 때문에 다른 가르침은 모두 도태된다고하여 ‘도태시(淘汰時)’ 空사상이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시킨다는 뜻으로 회일체법시(會一體法時) 5)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 법화경(8년간) 열반경(열반하시기 전 하루 동안) ·팔교(八敎) ·가르침의 방법에 따라 1)돈교(頓敎): 아무런 방편을 쓰지 않고 직접 진리에 접하게 하는 가르침 2)점교(漸敎): 여러 가지 방편을 써서 서서히 깨닫게 유인하는 가르침 3)비밀교(秘密敎): 저마다 부처님이 자기에게만 주는 것이라고 여기도록 하는 가르침 4)부정교(不定敎): 일정하게 정해진 것 없이 모두가 함께 듣지만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이해하게 되는 가르침 ·가르침의 내용에 따라 1)장교(藏敎): 경율론 삼장에 의한 가르침 2)통교(通敎):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 삼승(三乘)에 모두 통하는 가르침 3)별교(別敎): 보살승 수행자만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가르침 4)원교(圓敎): 원융무애의 최고 가르침 ·공가중(空假中) 삼제(三諦)사상 ·삼제(三諦): 만물의 실상이 세 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 1)공제(空諦): 모든 만물은 궁극적으로 空하다 2)가제(假諦): 현실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일시적(假)인 현상이다 3)중제(中諦): 사물의 실상은 空이면서 假고 假면서 空이기에 한쪽으로 쏠릴 수 없다 ·일념삼천(一念三千)사상 ·일념(一念): 한순간 ·삼천(三千): 삼천세계 ·一念+三千: 한순간 한가지 사물을 생각하면 그 순간 온 우주가 내 마음 속에 들어 있다 ※삼천세계※ ·화엄경: 십계(十界)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6도) + 성문, 연각, 보살, 부처 ⇒ 각각 나머지 아홉가지를 포함하고 있다. 10 X 10 = 백계 세계 ·법화경: 십여시(十如是) ·모든 사물은 열 가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열 가지: 상(相), 성(性), 체(體), 력(力), 작(作), 인(因) 연(緣), 과(果), 보(報), 본말구경(本末究竟) ·화엄경의 십계 X 법화경의 십여시=천계 ·「대지도론」: 삼종세간(三種世間): 오온계, 중생계, 국토계 ⇒ 모든 것은 이 세가지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천 개의 세계가 세 가지 세간에서 각각 다른 모습을 보이므로 삼천 개의 세계가 있다고 함 ·지관(止觀) ·止: 몸과 마음의 잡된 움직임이 완전히 정치한 상태 ·觀: 몸과 마음이 고요하면 우리 속에 있는 본래적 불성을 볼 수 있다는 것 ●화엄종(華嚴宗)● ·초조(初祖): 두순(杜順, 557-640) - 2대: 지엄(智儼, 602-668) - 3대: 법장(法藏, 643-712) - 4대: 징관(澄觀, 737-838) - 5대: 종밀(宗密, 780-841) ·「화엄경」 중심 ·법계(法界)사상을 가장 중요시 해 법계종(法界宗)이라고도 함 ·법계연기(法界緣起) ·法: 다르마 → 존재, 界: 다투 → 영역, 바탕 ·法界: 존재의 바탕 ·緣起: 모든 사물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法界緣起: 법계의 모든 사물은 상호의존, 상호연관 되어있다. ⇒ 상즉상입(相卽相入) 관계 ·사종법계(四種法界) ·법계연기 사상을 가장 잘 밝혔다는 4대 징관의 「법계현경(法界玄鏡)」에 나오는 설명 ·4가지 종류의 법계 1)사법계(事法界): 우리가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현상세계 2)이법계(理法界): 현상세계가 실체성이 없음을 깨닫고 더 깊은 면을 들여다보아 알아낸 실재 세계 3)이사무계(理事無界): 이법계와 사법계가 相卽․相入함을 깨달아 알아낸 세계 4)사사무계(事事無界): 사법계 사이도 相卽․相入임을 깨달아 알아낸 세계 ●정토종(淨土宗)● ·정토경(淨土經) ·정토삼부경: 「대무량수경」「관무량수경」「아미타경」 ·초조(初祖): 담란(曇鸞, 476-542) - 2대: 도작(道綽, 562-645) -3대: 선도(善導, 613-681) ·도작(道綽) ·염불(念佛)에 염주사용 ·念佛: 부처님을 생각함 ⇒ 「무량수경」에 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음 ·정토 삼존: 관세음보살┃아미타불┃대세자보살 세상에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의 신음을 들어주고 도와준다고 함 그래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함 ●선종(禪宗)● ·인도불교+도가사상 = 선불교(중국불교) ·초조(初祖): 달마(達磨, 약470-534) - 2대: 혜가(慧可, 487-593) - 3대:승찬(僧璨, ?-606) - 도신(道信, 580-651) ·5대: 홍인(弘忍, 602-675) - 신수(神秀, 605-706) ⇒ 북종선의 初祖 - 6대: 혜능(慧能, 638-713) ⇒ 남종선의 初祖 남종선:돈오를 강조하므로 돈오선이라고도 함 ·혜능(慧能) - 청원행사(靑原行思, 660-740) -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 -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 - 마조도일(馬祖道一, 707-786): 위앙종, 임제종
·선의 종류 1)외도선(外道禪): 불교 전통과 관계없이 일반인이 하는 명상수행 유루공덕(有漏功德: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 선) 2)범부선(凡夫禪): 불자 중에서 초보에 속하는 범부들이 수행하는 선 ‘나’를 완전히 없애지 못한 상태 3)소승선(小乘禪): 我空을 이해한 이들이 계속해서 하는 선 4)대승선(大乘禪): 我空+法空 5)최상승선(最上乘禪) ·의리선(義理禪):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이치를 깨달음 ·여래선(如來禪): 무색무공(無色無空)을 깨달음 ·조사선(祖師禪): 色卽是空을 깨닫고 일체를 긍정하며 이를 실행에 옮김
■ 상좌불교 ■ ●부파부: 기원전 5세기 중인도 마가다국 출신 승려 붓다고샤(佛音)의≪비수다막가(淸淨道論)》을 중심 ·慧,戒,定를 올바로 실천 → 淸淨(니르바나) <니르바나(淸淨)에 이른 사람: 아라한(무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 ●대중부: 부처 = 우주적 존재 ⇒ 존재론적 실체 X ⇒ 초월적 부처 O ■ 대승불교 ■ ·기원전 1세기 인도 서북부를 중심으로 출연 ·보살사상 발전 ·보살도(菩薩道): 6단계 1)진리를 들음 2)발보리심(發菩提心):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 3)서원(誓願: 맹세, 결의)을 세움 4)(부처가 될 것이라는 것을 당대 부처나 스승께) 확신을 받음 5)육바라밀(六波羅蜜)을 실천함 6)열 계단을 오름 ·육바라밀(六波羅蜜):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보시(布施): 자비의 마음으로 다른 이들에게 조건 없이 주는 것 → 삼독(三毒: 탐욕(貪), 미움(嗔), 어리석음(癡))을 극복 ·재시(財施): 물질을 나눠줌 ·법시(法施): 진리의 말을 나눠줌 ·무외시(無畏施): 남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나눠줌 ·지계(持戒): 윤리적 실천사항 ·10가지(살생, 도둑질, 음행, 거짓말, 분열을 가져오는 말, 거친 말, 쓸데없는 말, 욕심, 미움, 그릇된 생각)를 멀리함 ·인욕(忍辱): 참는 것 ⇒ 미움(嗔)을 극복 ·정진(精進): 힘쓰는 것 ·선정(禪定): 산란한 마음을 고정시키고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 ·지혜(智慧):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것 ·열 계단(十地) 1)환희지(歡喜地): 기쁨이 넘친다 2)이구지(離垢地): 더러움을 버리고 청정해진다 3)발광지(發光地): 내적인 지혜의 빛이 해처럼 빛난다 4)염혜지(焰慧地): 빛이 더욱 찬연하게 빛난다 5)난승지(難勝地): 무지에 갇힌 사람들이 이기지 못할 경지에 이른다 6)현전지(現前地): 사물의 실상을 얼굴을 맞대고 보듯 보게 된다 7)원행지(遠行地):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초월하였기에 이제 더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고 부처의 세계에서 천상의 보살이 될 정도가 된다. 8)부동지(不動地): 진리에 굳건히 서므로 더는 동요가 없고, 이제 뒤로 물러나는 일이 없게 된다 9)선혜지(善彗地): 선한 통찰로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능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가르친다 10)법운지(法雲地): 진리의 구름 속에 머물면서 중생에게 진리의 비를 내린다 ·법운지에 도달한 보살: 마하살(摩訶薩) ● 우주적 보살(摩訶薩) ● ·미륵보살(彌勒菩薩): 미래에 올 보살 석가모니 부처님을 대신하여 도솔천에 살다가 다시 내려오신다는 보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자대비한 보살 ·관세음(觀世音): (세상을)내려다 봄(=관자재觀自在) 《무량수경》《법화경「관세음보살 보문품」》에 등장 ·문수보살(文殊菩薩): 지혜의 보살 ·문수(文殊): 문수사리(文殊師利: 감미롭고 훌륭한 복력을 지닌 이), 문수시리(文殊尸利)의 준말 ·보현보살(普賢菩薩): 연명(延命) 보살 넓은 덕을 갖춘 이 문수보살 석가모니 부처 보현보살 : 석가삼존(釋迦三尊) ·지장보살(地藏菩薩): 석가모니 부처 열반 후 미륵보살이 현세로 내려올 중간시기에 현세의 중생을 구제해 주시는 분 육도(六道: 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를 다니며 중생구제에 힘쓴다고 함 ● 우주적 부처(깨달은 이) ● ·약 3천명의 중요한 부처가 있어 이들에게 한번 씩 절을 한다하여 ‘삼천배’라고 함. ·대표적 부처: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다보불, 아촉불 등 ● 대승불교 보살사상 ● ·대승불교 특유의 사상 ‘회향(回向)’ ·회향(回向): 1)우주적 보살들이 수많은 겁을 통해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여 쌓은 그 넘치는 공덕을 다른 불쌍한 중생에게 나누어 줌 2)우주적 보살 뿐 아니라 불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한다. ·방편(方便):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중생이 깨달음에 이르도록 도와주기 위한 방편, 곧 일종의 수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대승경전 ● ·반야경(금강경, 반야심경) : 空사상 ·유마경: 부처님의 재가(在家)제자 유마 거사 이야기 ·능가경: 의식문제를 다룸, 유가학파에 영향 ·의식만이 실재라는 ‘유식(唯識)’ ·모든 개별적 의식의 기초가 된다고 믿는 ‘아뢰야식(阿賴耶識)’ ·‘여래장(如來藏)’ ·법화경: 천태종 경전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으로 아라한, 연각, 보살 등의 여러 구별이 있지만 이런 것은 일시적 방편일 뿐 모두 부처님 수레 하나로 귀일되고 이를 통해 성불한다 ·정토경 ·대무량수경, 아미타경, 관무량수경 ⇒ 정토삼부경 ⇒ 정토종 소의(所依)경전 ·화엄경: 화엄종 경전 ·만물의 상호연관성과 상호의존성 강조 ·열반경: 천태종 경전 ·부처님의 우주적 의미와 대승교리 기술 ·열반경 ≠ 부파불교 「대열반경」 ·대열반경: 부처님 입멸 직후 사건 기술 ● 대승학파 ● ·중관학파(中觀學派, 공관학파) ·나가르주나(용수, 150-250) → 아랴데바(提婆, 3세기) → 부다팔리타(佛護, 5세기) → 바바비데카(靑辨, 6세기) → 찬드라키르티(月稱, 7세기) → 샨티데바(寂天, 8세기) ※나가르주나의 空사상※ ·초기 부파불교: 인무아(人無我) ·인무아(人無我): ‘나’라는 실체는 없다. 하지만, 나를 구성하는 5가지 구성성분(五蘊)과 기본요소(法)은 실체를 가진 독립된 실재이다. ·나가르주나: 법무아(法無我) ·法無我: 반야지(般若智) ·智(지혜): ‘나’도 ‘법’도 空(텅빔)하다는 것을 아는 지혜 ·지혜를 터득하지 못하는 이유: 잘못된 견해(邪見)때문 ·空사상 1)연기(緣起)법칙에 따라 생겨나는 모든 것은 空하다: 일체 사물에는 자성(自性)이 없다 2)궁극적으로 실재의 참 모습이 空하다 ·실재의 참 모습: 법성(法性), 실상(實相), 진여(眞如) ·사물을 참 모습을 보게 되면 空하다라는 것을 깨닫는다. ※여래장(如來藏)사상: 3,4세기 경※ ·인간은 생래적으로 여래장을 품고 있다. ·如來: 이렇게 오신 이, 이렇게 가신 이, 깨달음을 이루신 이 ⇒ 부처 ·藏: 모태 + 태아 ·如來+藏: 인간은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 ·불성(佛性), 자성(自性)사상과 함께 동아시아에서는 중요하게 취급 ● 유가학파 ● ·기원전 5세기경 중관학파를 보완하기 위해 아상가(無着, 약410-500)와 바수반두(世親, 약420-500) 두 형제가 유가학파(瑜伽學派)를 만듦 ·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 : ‘의식’이 생기면 여러 가지 사물이 생기고, 의식이 없어지면 여러 가지 사물도 없어진다. ·의식 → 구체화: 팔식(八識), 삼성(三性), 삼신불(三身佛) : 원효대사 ‘三界唯心造(세상은 모두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 ·팔식(八識) :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식(意識)+마나식(末那識: 자의식)+아뢰야식(阿賴耶識) ·아뢰야식(阿賴耶識): 의식의 저장소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실제로서의 세상이 아닌 아뢰야식에서 나온 세상일뿐 ·삼성(三性) 1)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허상으로 된 실재 2)의타기성(依他起性 ): 인과관계에 의해 생성된 사물 3)원성실성(圓成實性): 참대운 실재(實相) ·삼신불(三身佛): 3가지 차원의 부처 1)법신(法身): 우주의 궁극 근원 2)보신(報身): 보살도를 완성하고 그 과보(果報)를 얻는 영광스런 부처님 예)아미타불 3)응신(應身,化身,應化身): 역사적 부처님 예)석가모니불
■ 탄트라 ■ :기원전 2500년 경부터 시작된, 인도의 오랜 전통으로 주술, 주문, 환상, 남녀교합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서민층을 위한 토속적 종교형태 ·6,7세기 경 불교적 변용: 금강승(金剛乘) 혹은 밀교(密敎) ·만다라(曼陀羅): 명상 수련에서 마음을 집중 ·만트라(眞言): 주문을 반복적으로 외움 ·무드라(手印, 印相): 두손을 모으고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듦
■ 인도불교의 쇠망 ■
서기전 6세기경 출현 → 서기 1세기 전후(전성기) → 8,9세기(쇠퇴) ●쇠망 이유● 1)힌두교의 부흥 ·7세기경 힌두교가 부흥하면서 부처님을 바쉬누 신의 현현(다바타르)으로 해석하는 등 불교를 힌두교의 일부로 보기 시작 2)외부침입 ·6세기부터 인도 서북부 간다라 지방에 들어온 훈족(?)의 침입 ·8세기 이후 이슬람 터키인의 침공 3)불교자체의 문제 ·외관만 커지고, 일반인들과는 점점 멀어짐 ·종교적 수행과 이론만 몰두하는 폐쇄집단화 ·사회 저변에 뿌리박지 못하고 전문 승려만을 위한 특수층 종교로 변질
■ 부처의 일생과 입멸 후 ■ ·도솔천에서 살던 보살이 새로운 부처가 필요함을 알고 도솔천을 미륵보살에게 맡기고 지상(마야부인의 몸)으로 들어감 ·도솔천: 우주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도솔천은 욕계의 한 부분이라고 한다. ·마야부인 옆구리에서 태어남. 이름은 가우타마(싯다르타: 목적을 이룬 이 / 팔리어로 고타마) ·아시타 선인의 방문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이야기 사문(四門): 4개의 문에서 노인, 병자, 시체, 승려(沙門)를 봄 ·라훌라(걸림) 탄생 ·수행을 떠남 ·6년간 수행(修正主義) ·첫번째 스승: 힌두교 상카 계통 ‘칼리마’ ·두번째 스승: 라마푸트라 ·5명과 고행(苦行主義)
·시험에 듦 ·죽음의 신 ‘마라’의 시험 1)마군(魔軍)으로 위협 2)色(불만, 쾌락, 욕망)으로 위협 3)싯다르타의 공덕을 부인 ·(5명과 헤어진 후) 스스로 깨달음 ·성불 후 (5명과 다시 만나) 녹야원에서 첫 설법(1차 전법륜(轉法輪), 초전법륜(初轉法輪): 사성제와 팔정도 ) ·첫 설법 후 콘단냐(5명 중 한 명)가 깨달음. 콘단냐는 아라한(阿羅漢, 줄여서 羅漢)이 됨 ·무아(無我: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에 대해 다시 설법, 그리고 4명의 깨달음 ·상가 조직 → 번영 → 녹야원을 떠나 ‘우루벨라’로 이동 ·마가다 왕국의 수도 ‘라자그리하'에서 두 달간 머묾: 제자가 2만명이 됨 ·부처님 고향으로 이동: 부처의 아들 ‘라훌라’의 사촌 ‘아난다(阿難陀)’와 ‘데바닷다(提婆達多)’도 불교에 귀의 ·그 후 입멸(入滅) ·결집(結集): 부처님의 말씀을 공식적으로 모으는 작업 ·1차 결집: 입멸 직후 마가다국 수도 라자그리하에서 500여명이 무임 ·마하가섭이 주도 ·승단과 관계있는 부처님 말씀: 律 ·‘아난다’가 일러준 부처님 말씀: 經 ·부처님의 가르침 중 특별한 문제나 주제에 더욱 상세하고 체계적 해설: 論 律+經+論: 三藏 ·2차 결집: 기원전 390년경 ‘베살리’에 모임 ·승가의 몇 가지 규율에 대한 논쟁 ·전통 고수: 상좌부(上座部) → 12개 부파(部派) ·변화 주장: 대중부(大衆部) → 6개 부파(部派) ·3차 결집: 기원전 247년 아소카왕이 주선 ⇒ 불경의 문자화 시작
■ 부처의 성불 체험 ■ : 4단계 선정(禪定)과 3가지의 앎 ● 4단계 선정 ● ·1)숙명통(宿命通): 깊이 생각하고 검토하는 일 같은 이성적활동과 함께 상쾌함, 즐거움 등의 감정이 생겨나고 마음이 한 점에 모임 ·2)천안통(天眼通): 이성적 활동은 사라지고, 내적 평정과 한 없이 고양되는 느낌이 더해짐 ·3)누진통(漏盡通): ‘마음이 한 점에 모임’ + 마음의 평정, 마음다함, 맑은 통찰이 생김 ·4)성불(成佛): ‘마음이 한 점에 모임’은 사라지고 마음의 평정, 마음다함, 맑은 통찰만 남음 1) ~ 3): 삼명통(三明通)
■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 ■ ● 사성제(四聖諦) ● ·고제(苦諦): 괴로움에 대한 진리 ·생로병사(生老病死):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四苦) ·원증회고(怨憎會苦): 원한을 품어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 ·구부득고(求不得苦):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 ·오음성고(五陰盛苦): 생멸의 변화로 말미암은 괴로움 ·집제(集諦):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 ·멸제(滅諦): 괴로움을 없앨 수 있음에 대한 진리 ·도제(道諦):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에 대한 진리 → 팔정도(八正道) ● 팔정도(八正道) ● ·정견(正見): 바른 견해(이해의 명료함) ·정사(正思): 바른 생각(생각의 순수함) 正見+正思: 慧(설법을 통해 얻는 지혜) ·정어(正語): 바른 말 ·정업(正業): 바른 행동 ·정명(正命): 바른 직업 正語+正業+正命: 戒( 윤리적 지침) ·정정진(正精進): 바른 정진 ·정념(正念): 바른 마음다함 ·정정(正定): 바른 집중 正精進+正念+正定: 定(마음을 다스리는 명상법) 慧,戒,定: 三學
■ 초기 경전(팔리어, 산스크리트어) ■ ●팔리어 경전 : ‘니카야’ 디가 니카야(長部), 마지마 니카야(中部), 싸뮤타 니카야(相應部), 앙구타라 니카야(增支部), 쿠다카 니카야(小部) ●산크트리어 경전: ‘아가마’ → 《아함경(阿含經)》 장아함(長阿含), 중아함(中阿含), 증일아함(增一阿含), 잡아함(雜阿含)
 마르크스교 2대 주교이신 프리드리히 엥겔스님의 책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상가이다. 이런 사상가가 인류학에서 연구하는 부분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쓴 글이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미국의 유명한 인류학자인 헨리 모건의 《고대사회》에 대해 자신 나름대로 필기를 해 놓은 것과 엥겔스 자신이 여러 책에서 수집한 내용을 짜깁기해서 적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총 9장으로 쓴 책을 문고판인 책세상에서는 1장과 2장만 옮겼는데, 사실 2장이 가장 중심내용이라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여러가지 부분에서 받아들일 점과 비판할 점이 있다. 여기에는 이 책의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해 적어본다. 1.엥겔스는 사상가이다. 단순히 자신의 지적만족을 위한 철학자가 아닌 사회사상가이다. 이 사상가가 마르크스와 만든 사상에 인류학이라는 학문을 끼워 맞췄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고, 용서가 안 되는 일이다. 이미 결론은 났다. 줄거리도 생각해 놨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근거가 필요하다. '미개사회에선 여성들의 권위가 남성들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 여성들의 지위가 낮아졌다. 사적소유라는 부분에서 경제권을 남자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성우위는 계속된다. 사회주의, 즉 사적 소유가 없어지고 모든 소유권이 공공의 것이 된다면 경제권 때문에 억압받는 여성들은 없어질 것이다. 다시 여성의 권리가 남성과 동등해 질 것이다.' 결론은 이미 났고 줄거리도 있고, 근거만 찾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근거를 모으는 과정에서 자신의 구미에 맞는 부분은 취하고 자신과 다른 생각이 적힌 근거는 무시해버린다. 이것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학문연구가 순수하게 학문연구만을 위해서 이루어질 순 없으나, 아예 처음부터 작정하고 하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2.엥겔스는 이렇게 말한다. "생산 수단이 사회 소유로 전환됨과 함께 임노동도 프롤레타리아트도 소멸되어, 일정한 수의 여자들이 돈을 받고 몸을 팔아야 하는 필요성도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113쪽)" 사적 소유가 없어지고 사회 소유로 전환되면 여성의 권위가 미개사회처럼 높아져 돈을 받고 매춘행위는 없어질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한가. 변질한 마르크스주의라고 해도 어쨌든 사회주의를 표방한 구소련, 동유럽, 중국, 북한에도 매춘행위는 여전히 존재했다. 권력이 있고, 계급이 있고, 그 계급의 대부분이 남성이라면 몸을 파는 여자들은 있을 수밖에 없다. 엥겔스의 예상은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3.번역자의 문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몰라도. 번역된 것을 보면 엥겔스는 고대의 가족 문화를 말하면서 대부분이 '-이다.'로 끝낸다. '-일 것이다.'가 아닌 '-이다.'라는 것은 이미 이 사람은 학자가 아니라 사상가로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료를 모은 것이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엥겔스가 이 책은 쓴지도 100년이 훨씬 지났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100년이면 강산이 열 번은 더 변했을 기간이다. 이 기간에 인류학 연구자료는 많이 쌓이고 새로운 사실들도 많이 발견되었다. 어떻게 보면 엥겔스 당시(초기 인류학시기)의 이론들은 이미 단순한 고전으로밖에 취급을 못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학문을 할 때 언제든지 바뀔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글을 써 내려가야 함에도 그는 자신의 견해가 인류 보편적이라는 오만함을 가지고 글을 쓴 것이다.
엥겔스는 가족의 변화를 군혼(群婚) ->(푸날루아 가족 )-> 대우혼(對偶婚) -> 단혼(單婚)로 주장한다. 마르크스교 조선 담당이셨던 백남운 선생의 《조선사회경제사》 앞 부분을 보면 마르크스교 신자답게 비판적 견해가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멍청한 엥겔스의 영향이 후대 마르크스교 신자에게 어떤 식으로 미쳤는지《조선사회경제사》앞부분을 인용한다.
제3장 씨족사회에 관한 학설 제2절 혈연가족 『‥(생략)‥ 가장 오래된 최초의 가족형태는 군혼(群婚)이었다. 남자의 모든 무리와 여자의 모든 무리가 서로 상대를 소유하고 질투의 여지가 거의 없는 형태였다.』 제3절 푸날루아 가족 『‥(생략)‥ 남편과 아내의 상호적 공유형태로서의 푸날루아 가족은 가족형태의 전 발전단계에서 전형적인 양태이며 씨족사회의 기본조직이었다.』 제4절 대우혼 가족 『‥(생략)‥각 군혼형태 중에서 푸날루아 가족은 그 최고의 발전단계이며 모계 씨족공산사회의 전형적인 사족 형태였다. 또한 그것은 모든 민족이 동일하게 거쳐온 단계이며, 세계사적 규모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한 하나의 친족제도였으므로 이것을 구명하는 것만이 선사시대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발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말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성경을 읽고 성경무오류설에 빠져 허덕이는 멍청한 신도들과 마르크스 - 엥겔스가 펼친 주장이 그저 하나의 주장이 아니라 전세계사적으로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마르크스 - 엥겔스 당신네도 하나의 종교를 만들지 않았는가 말이다. 21세기 우리나라 마르크스 신도들의 글을 보라. 비판적 발전은 없고, 마르크스가 한 말, 그의 이론에 매달리는 불쌍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사회 운동가 사상가라면 자신의 사상에 맞게 갈겨쓸 일이지, 학문에다 손을 대 엉망으로 만들고 멍청이들을 양산하다니.... 올해 내가 읽은 책 중에 최악의 책이다.
2009년 5월 25일
 저자인 오강남 교수의 책은 대부분 읽은 것 같다. 시간이 없어 미루고 있었는데, 이번에 기회가 되어 읽어보았다. (故 김달진 선생님의 불교이야기는 부처생애가 대부분이라 입문서 성격으로는 크게 맞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을 선택하였다.) 저자는 예수교신앙을 가진 사람인데, 특이하게 박사학위논문이 『화엄의 법계 연기사상에 관한 연구』이다. 보수 예수교 신앙을 가진 집안에서 자랐고, 예수교 신앙을 여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30년 이상 불교를 공부했다고 한다. "하나의 종교를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 저자가 막스뮐러의 말을 인용한 것처럼 자신의 종교만 알고 그것만 믿는 사람에게는 발전의 가능성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수교인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불교인도 그렇고 회교인도 그렇다. 자신의 종교만 옳다고 굳건히 믿는 사람은 진리를 찾지 못하고 신앙의 걸음마 단계에서 멈춘 채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저자가 캐나다에서 가르치는 과목이 비교종교학이다 보니, 이 책도 예수교와 불교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잘 적었고, 불교에 대해서는 최대한 객관적인 관점에서 적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흔히 '불교'라고 하면 부처? 부처님 오신 날? 성철스님? 수많은 경전? 무슨 무슨 보살? 조계종? 정도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저자는 불교의 얼거리를 잘 잡아서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불교의 철학이 난해하다고 생각하면 끝없이 난해한 철학인데, 어떻게든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쉬운 예들만 들어서 설명해준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하나 아쉬운 점은 인도불교, 중국불교는 자세히 적었지만, 한국불교, 일본불교, 티베트불교는 거의 지면 할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야 다른 책에서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넘어가더라도 일본불교와 티베트불교는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 일본, 티베트불교보다 오히려 서양불교 내용이 훨씬 많은 분량을 차지했는데, 과연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양키들의 불교에 대해 궁금해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부분이 아쉽다. 다른 불교 입문서 혹은 좀 더 깊이 있는 불교 책을 보기 전에 이 책을 먼저 보고 이해하고 나서 다른 책을 보게 된다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2009년 5월 21일
 150쪽밖에 되지 않는 이 책을 읽는데, 엄청난 시간을 들였다. 《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보다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이제야 다 읽었다. 이제껏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뭔가,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또 뭔가를 이렇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결론은, '없다.'이다. 파르티잔이 현재 나에게 주는 의미나 이 사회에 주는 의미를 찾지 못하였다. 단지 지식 늘이기에 다름 아닌 책이었다.
법학을 공부하지 않는 이상 저자 칼 슈미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책의 날개에 적힌 그의 이력을 잠시 살펴본다.
『칼 슈미트는 1888년 독일 플레텐베르크에서 출생했다. 베를린 대학과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부터 그라이프스발트, 본, 베를린 상과 대학, 쾰른,베를린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나치스에 협력한 죄과 때문에 제2차 대전 후에는 대학에서 추방되고,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85년 플레텐베르크에서 사망했다. 주요 저작으로는 《정치신학》《정치적인 것의 개념》《독재론》《헌법 이론》《대지의 노모스》《헌법론집》등이 있고, 그외에 수많은 논문이 있다.』 나치에 협력했다기보단 그의 법학 이론(결단주의)이 나치당에 정당성을 부여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파르티잔'을 우리나라에서는 그 음을 따 '빨치산'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빨치산과 실제 역사의 파르티잔은 관련이 없다. 저자는 최초의 파르티잔을 1808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공격했을 때 나타났다고 한다. 스페인의 파르티잔은 비정규군으로 게릴라 방식으로 싸웠던 국민(인민) 대항군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빨치산이라는 이미지가 공산주의와 겹치는 것은 당시 소련, 북한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잘못된 상식은 버려야 한다. 파르티잔은 공산주의와는 전혀 관계없다. 파르티잔은 공산주의가 나타나기 전부터 있었고,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네 독립군 중에서도 파르티잔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부대가 많았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 파르티잔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파르티잔은 단지 적군과 싸우는 인민부대로서 비정규군일 뿐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파르티잔의 출발, 그리고 여러 혁명가들(레닌, 모택동, 라울 살랑, 호찌민)을 거치면서 파르티잔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그리고 현재성까지 논하고 있다.
법학자다보니 정치적인 면보다는 법적인 측면에서 파르티잔을 바라보기 때문에 단순 호기심으로 이 책을 택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단 하나. 이제껏 어렴풋이 추측만 했던 고대~근대이전까지 유럽의 전투경향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는 게 이 책에서 딱 하나 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레닌 자신이 전쟁과 게임을 구별하는 것을 제2권 제23장의 한곳에 있는 주석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 논리 속에는 틀을 깨뜨리는 결정적인 진보가 있었는데, 그 틀이란, 18세기 유럽 대륙 국제법에서 국가간의 전쟁으로 성공적이었던 틀이며, 1814-1815년의 빈회의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그렇게도 성공적으로 복고시킬 수 있었던 틀인데, 그 틀을 제거한다는 것은 클라우제비츠조차도 실제로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절대적인 적대 관계의 전쟁과 비교해볼 때 승인된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고전적인 유럽 국제법상 틀에 박힌 전쟁은 결투신청에 응할 수 있는 기사들 사이의 결투와 같은 것이다. 레닌과 같이 절대적인 적대 관계의 혼이 들어 있는 공산주의자에게 그러한 종류의 전쟁은 하나의 순전한 게임으로서, 적을 기만하기 위해 사정에 따라 함께 게임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경멸하며 우스운 것으로 여기는 게임으로 여겨질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88쪽 인용) |
2009년 5월 16일
 우리나라처럼 척박한 환경에서 인문학에서도 기초 학문인 '문화 인류학'의 입문서(혹은 개설서)로써 이만한 좋은 책이 있다는 것에 저자들께 감사드리고 싶다. 수많은 학문에 수많은 입문서와 개설서가 있다. 하지만, 인문학 분야에서 우리나라 학자가 모여서 이렇게 좋은 책을 내기란 쉽지가 않다. 사회학 분야만 하더라도 제대로 된 사회학 입문서가 없어, 아직도 '앤서니 기든스'의 《현대 사회학》이 사회학 입문서의 최고 자리를 꿰차고 있다.(이진경이란 사람이 자꾸 책을 내는 것 같은데, 그 사람 책은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이 없다.) 14명의 저자가 자기들 분야를 한 부분씩 맡아 집필하여 총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분이 서로 다른 저자에 의해 쓰이긴 했지만, 책 전체를 보면 한 단어로 압축시킬 수 있다. '문화 상대주의'
잠시 차례를 살펴보면 제1장 왜 문화인가? 제2장 현장으로 가자 제3장 루시에서 사이보그까지 - 인간 진화 이야기 제4장 여성성과 남성성 제5장 혼인과 가족
현장조사는 인류학의 특수한 연구 방법이기 때문에 제외하고 보면, 제1장 왜 문화인가에 대해서는 문화의 개념과 문화인류학을 왜 배워야 하는지를 상술하고 있다. 3장은 고인류학에 대한 이야기. 4장은 우리가 아는 여성의 정의, 남성의 정의. 여성적이라는 것, 남성적이라는 것은 본성이 아니라 문화에 의해 습득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특히 마거릿 미드의 저서 《세 부족사회에서의 성과 기질》을 인용하여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姓에 대한 생각이 다른 문화에서는 그 반대라는 것 등을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5장도 혼인이니 가족이니 하는 개념이 문화마다 다르고 우리가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한다. 나머지 부분인 정치, 경제, 문화 여러 가지 분야에 대한 설명도 '문화 상대주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주장으로 볼 수 있다.
한마디 덫붙이자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통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전통이 아닌 경우가 더 많다. 전통은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일 전쟁이후 성리학의 교조화로 말미암아 그전에 있던 전통은 단절되고 모든 것이 성리학 형식에 맞춰져 지금까지 내려왔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전통이라고 하는 것에 대부분은 300-400년 정도 된 것들이다. 姓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끔 라디오를 듣다 보면 '원래 여자는 이래, 여자라는 동물은 원래 그래'라는 식의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이 책의 4장에서 언급하듯이 姓이라는 부분도 사회에 따라 학습 되는 것이지, '원래 그런 것'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들어졌건 학습 됐건 한번 만들어진 전통에 대해서 쉽게 부인해서는 안된다. 300-400년 전이라는 기간은 최소한 10세대(1세대당 30년 정도)는 거슬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사회적 합의, 혹은 암묵적 동의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쉽게 '이것은 시대에 맞지 않아' '이건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니까 없애버려도 돼'라는 식의 생각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쓸 이야기는 많지만, 책에 관련된 것이 아니므로 이만 줄이기로 한다.)
책을 읽으면서 동의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큰 맥락에서 비춰보면 대부분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게 된다.
문화인류학 개설서라는 성격에 충실하고 내용도 어렵지 않아 읽기에 불편함은 없다.
이런 식의 개설서들이 다른 학문에도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9년 5월 11일
지금은 잠시 보류 중인 《황금가지》를 읽으면서 '말리노프스키'라는 인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말리노프스키는 원래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제임스 프레이저의 불후의 명작《황금가지》를 읽고 진로를 인류학으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프레이저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말리노프스키는 기능주의 인류학의 창시자라고 한다. 이름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분류한 것에는 관심이 없기때문에 기능주의가 뭔지는 잘 모른다. 단지 내 나름대로 예측을 하자면, 말리노프스키의 연구 성향이 신화의 문화적, 사회적 기능을 중시했기 때문에 기능주의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말리노프스키와 프레이저의 가장 큰 차이는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의 모든 것을 책만을 참고하여 기술하였다면, 말리노프스키는 직접 원시부족에 뛰어들어 원시부족의 한 일원이 되어 함께 생활하며 그들을 관찰했다는 것에 있다.
말리노프스키가 선택한 곳은 멜라네시아(호주 동북쪽)의 서북 지역인 트로브리안드 제도였다. 이 책도 그가 트로브리안드 제도에서 관찰한 것을 토대로 쓴 것이다.
책은 마지막 부분인 '말리노프스키의 저작목록'과 '역자 후기'를 제외하면 약 80쪽 정도로 얼마 안 되는 분량이다. 얇아서 좋긴 한데, 책 내용은 절대 쉽지 않았다.
총 4부분으로 구성된 이 책의 차례를 보면 제1장 일상생활에 있어서 신화의 역할 제2장 기원에 관한 신화 제3장 죽음과 생명윤회의 신화 제4장 주술에 관한 신화
주제마다 여러 종족의 이야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그가 생각하는 신화의 개념은 하나로 통일된다. 책 군데군데 있는 그의 생각을 옮겨적고는 싶지만, 워낙 길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역자가 정리한 부분이 이해하기 편해 옮겨본다.
말리노우스키는 신화를 이야기 그 자체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 관련시켜 이해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말리노우스키 이전에는 신화를 자연현상의 상징적 표현, 또는 과거의 사실에 대한 설명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했다. 그러나 말리노우스키는 신화를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과거를 설명하는 그 이상의 것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견해는 신화를 사회적·문화적 맥락과 유리시켜 이해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이와 달리 사회적·문화적 맥락과 관련시켜 볼 때, 신화는 태초에 일어났던 사실을 설명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고 신화적 사실은 지금도 인류의 생활·운명·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는 진실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 진실은 일종의 선례로서 현존하는 사회 질서, 윤리적 가치, 종교적 신앙 등을 정당화하며, 전통을 강화해 준다. 결국 말리노우스키는 신화의 사회적·문화적 기능을 강조했으며, 신화의 사회적·문화적 기능이란 신화와 관련되는 모든 행위를 보증하는 실용의 헌장이며, 문화적 힘이라는 것이다. |
다만, 그의 연구방법에 있어 한계점은 그가 체험한 트로브리안드 제도의 신화이야기를 신화의 전반적인 이야기로 일반화시켰다는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내가 인류학을 전공하는 후학자라고 한다면, 연구방법론 자체의 문제보다는 논리의 오류에 대한 비판이 먼저였을 것 같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읽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만족했다. (역자의 한글 실력은 진짜 어처구니없다. 위 인용 글을 보면 알겠지만, 이 짧은 글에서도 일본어투 영어식 표현이 보인다. 책 전체적으로 따지면 정말 많다. 대학교수라는 직함이 정말 부끄러울 정도다.)
마지막으로 말리노프스키(1884-1942)와 같은 시대 우리나라 백남운(1895-1974)이 말한 신화의 개념에 대해 참고로 적어본다.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는 1933년 말리노프스키의 《원시신화론(원제:Myth in Primitive Psychology)》는 1926년에 출판된 것으로 7년의 기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기능주의자 인류학자가 말한 신화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가 말한 신화의 개념을 비교해 보면 학풍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우리의 입장에선 신화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또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생산관계적 행동의 반영, 혹은 지배와 복종의 관념형태로서 규정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신화의 제재로 나타나는 자연물 자체는 무의미하지만, 그것들을 인격화함으로써 비로소 신화다운 의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이 유일한 특징으로 보이는 인격화를 종래의 신화학처럼 그 자체를 신비적인 실제로 인정하지 않고 인격화의 의상을 벗기고 그 이면에 가로놓여 있는 현실관계를 환원시켜 원시적·자연적인 상태를 이해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이른바 신화의 제2의 특질이라고 불리는 세계적 유사성에 대해서도 종래의 신화학처럼 동일한 기원의 전파로서 제재의 계열에 의해 신화의 본가 싸움과 같은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고 인간의 현실적인 관계의 세계사적 유사상의 표명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제재가 각양각색인 것은 그것을 에워싼 환경적인 조건의 특수성에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현실적인 생활관계가 신화에 의해 지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신화가 현실적인 생활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생활의 발전과 함께 계급적인 분열이 생겨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관념형태로서 신화가 형성되고 계급사회가 존속되는 한 신화가 계급적인 임무를 보유하는 것을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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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3일
 예전 정치학 공부할 때 정치학 입문서로 추천받은 책인데, 이제야 읽어보았다. 작가의 주장은 간단하다. '진리란 논쟁이 필요 없는 영역이다. (갈릴레이가 재판장에서 지구가 돈다는 말을 번복했지만, 지구가 도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는 인간들의 여러 견해가 존재하고(저자는 인간의 복수성으로 표현) 존재해야만 하는 공간이므로 정치에 진리를 적용시키면 안 된다.'
작가가 비교적 쉽게 쓰려 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다른 정치학관련 서적보다 일반인이 읽기에 무리가 없다. 고등학교 '정치'에서 조금 더 들어갔다고 보면 될 것이다. 책 내용은 논외로 하고, 이 책의 작가에 대해서는 약간 쓸 것이 있다. 작가는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맺음말에서도 자신의 글이 한나 아렌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나 아렌트가 누군지 모르고, 별 관심도 없다. 내가 이 책에 불만을 느낀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예시, 용어를 비롯한 내용 자체가 다 서양 것이다. 최소한 정치철학 입문서라고 한다면, 동양과 서양의 합일점에서 글을 써야 할 텐데 예시를 드는 것도 플라톤이니,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등 이런 식이니 아무리 서양 정치철학을 전공했다고 해도 이런 절름발이 시각은 편협한 생각을 만들 뿐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서양'이다. 정확히 말해 주체성 없는 서양 학문 받아들이기다. 주체성 없는 흡수는 그 정신까지 받아들이게 되는 것으로 서양 학문을 배운 것이 아닌 인간 자체가 서양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이 진짜 한국인 쓴 것인지, 외국 저자의 글을 번역한 것인지 긴가민가 할 정도로 서양냄새만 풀풀 풍긴다. 책의 제목을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 입문'이라던가,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 - 그 비판과 발전' 이런 식의 제목으로 지었으면 모르되, '정치와 진리'라고 하여 서양 정치철학을 전공한 저자의 생각을 일반화 시키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서양냄새 풀풀 풍기는 책인 줄 알았다면, 차라리 한나 아렌트의 책이나 하버마스의 책을 읽는 것이 오히려 나을 뻔했다. 2009년 4월 22일
 불교는 종교라기보단 철학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교의 세계에 선뜻 들어가기가 무섭기도 하다. 달라이라마께서 그 무서움을 친절한 어투로(물론 번역한 것이지만) 덜어주신다. 불교는 크게 상좌불교(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뉜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경전이 《반야경》과 《금강경》이다. 《반야심경》은 반야경 일부분으로 가장 핵심적인 교리를 담고 있다. 반야심경 내용 자체는 몇 글자 되지 않지만, 이해하려면 불교의 기본교리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달라이라마께서는 본격적인 반야심경 강의 전에 불교의 밑그림을 그려주시고 반야심경을 강의하신다. 반야심경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공성(空性)이라는 것으로, 달라이라마께서는 강의 대부분을 '공성'과 '무아'라는 개념에 대해 세밀하게 말씀해주신다. 책은 200쪽 남짓의 얇은 책이지만, 정신줄 놓고 읽으면 하나도 남는 것이 없게 된다. 이어지는 개념 속에서 하나의 고리를 놓쳐버리면 어느 순간 '대체 뭘 말하는 거야?'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반야심경을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틱낫한 스님의 반야심경을 권하고 싶다.
불교에 대해 이제 어섯눈이 뜨였지만, 조금씩 정진해 나가고 싶다. (별이 3개 반인 이유는, 책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지 책의 내용 때문이 아님) 2009년 4월 8일
'파르티잔'이라는 책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이다. "왜 이 책을 읽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던 중 문득 경제학에서 말하는 매몰비용과 한계효용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났다. '합리적 인간은 매몰비용을 고려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미 지나간 것은 잊어버리고 이후에 자신에게 효용이 있는지만 생각하라는 말이다.
흔히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인 인간의 기준이 되는 것이 '개인은 효용을 극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한계효용이 한계비용보다 크다면 그 일은 거기서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한계효용에 대해 설명하는 예로써, 아이스크림을 한 개 먹을 때와 두 개 먹을 때 효용이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아이스크림을 한 개 먹고 한 개 더 먹었을 때의 효용(만족감)과 비용(물림)을 비교해서 만족감이 더 크면 먹어도 좋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매몰비용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경제학 교과서에서 이런 예를 든다. '갑이라는 사람이 영화관을 갔다. 갑에게는 영화가 지루해서 못 참을 것 같았지만, 영화표를 산 것이 아까워 그냥 봤다. 이런 인간은 매몰비용을 고려하지 못한 비합리적 인간이다'
'경제학은 현존하는 사회과학 분야 중 가장 쓸모없는 쓰레기 학문에 불과하다.'라는 것이 내 평소 생각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이러한 매몰비용을 고려한 한계비용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보자. 갑은 (대체 뭐가 기준인지는 몰라도)합리적인 인간이다. 항상 자신의 한계효용을 고려한다. 극장에 가서도 책을 읽을 때 등등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어떤 상황에 부닥치든 간에 합리적으로 행동하려 한다. 그런데 남들이 보면 무언가를 시작하지만, 중간 그만두는 성향이 있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단지, 자신의 효용 즉 만족감 따위만을 고려하면서 하다 말고 하다 말고 이런 것들이 습관이 되면, 자기 하기 싫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 이런 인간을 뭐라고 할까. 난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싶다.
정 신 병 자
지극히 개인적이고 남을 배려하지 못한 인간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인간이 되라고 경제학은 가르치고 있다. 한마디로 '까는 소리 하고 있네!' 어떻게 보면 양코배기 놈들을 정신세계에서 나온 것이니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는 한국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제학 교과서 나부랭이라고 찍어대는 것들 첫 부분에 당연하듯이 이런 이야기들이 나온다. 물론 높은 학력을 가지고 계시는 당신네 경제학 교수놈들 자체가 대부분이 양키물을 먹고 와서 자신이 양키인 줄 아는 쓰레기분들이니까, 어쩔 수는 없겠다.
하지만, 가끔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아무리 현대 경제학이란 학문이 양코배기 놈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우리네 한국에서도 분명히 ('경제학'은 없었을지라도) '경제'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있어왔을텐데, 내가 아는 바로는 서울대 경제학 '이영훈'교수(조선 후기 경제사) 이외에는 제대로 연구하는 교수놈들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이영훈같이 고명하신 교수 따위가 연구를 하니 우리나라 경제사 연구는 거의 불모지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된다.
서양학문을 들여왔다고 양키들이 하는 개념까지 따라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경제학계에서도 자유주의나 마르크스주의니 하는 양코배기 놈들의 사상만 연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네 역사에서 우리네 조상이 고민했던 부분에 대해 같이 고민할 수 있는 교수님이 나왔으면 한다.
언젠가 경제학계에서도 법학계의 김재문 교수 같은 분이 나올 거로 생각해본다.

종교란 참 골치가 아픈 존재다. 특히 종교에 대한 논쟁은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지 않을까 한다. 19세기 막스 베버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학자들은 탈주술화를 주장하면서 종교의 종말을 고했지만, 21세기에 와서도 종교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THE GOD DELUSION》이라는 발칙한 제목을 내걸고 유명한 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교수가 신은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종교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책의 전반부는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저자가 이전부터 주장해왔던 '이기적 유전자'이론으로 신은 없다는 주장을 펼치게 된다.
총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딱 절반(페이지 숫자로)인 6장까지는 과학적인 논거로 신의 허구성에 대해 주장을 하고, 7장부터 10장까지는 성경의 문제점과 자신이 종교를 적대시하는 이유 등을 적었다.
이런 부류의 책은 많이 나온 걸로 아는데, 유독 《만들어진 신》이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이 시대 대표적 진화론자인 저자의 명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몇 가지 언급하자면,
첫째.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독교가 미국에서 盛한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지만, 말기 암 환자 같은 상태에 있는 국가인지는 미처 몰랐다.(그래서 저자는 미국을 '신정 국가'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몇 몇의 예로 미국 전체를 그렇게 파악하는 오류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한다.) 미국과 다른 나라와 차이는 역사적 경험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어보자. 조선시대 특히 조일 전쟁 이후, 조선은 성리학이라는 거대한 종교의 압박에 다른 것은 허용되지 않은 종교국가였다. 성리학의 교리와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면 '사문난적'이란 어이없는 낙인을 찍어 정계에서 내쫓거나 사형시켜버렸다.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과 다를 바가 없었다. 구한 말부터 시작된 신흥종교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중심축이 되었다. 이런 역사적 경험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수많은 종교가 공존해왔다. 하지만, 미국은 처음부터 기독교인들이 세운 국가였고, 나라의 역사도 길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이러한 현상은 역사적 과도기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한다.
둘째. 국립 과학 아카데미와 왕립학회의 엘리트 과학자들 외에도 일반 국민 중 교육 수준이 더 높고 더 지적인 부류가 무신론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가 있을까? 몇몇 연구 결과들은 신앙과 교육 수준, 혹은 신앙과 IQ 사이에 통계적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마이클 셔머는 동료인 프랭크 셜로웨이와 함께 무작위로 선정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우리는 어떻게 믿는가 : 과학 시대의 신 탐구》에 발표한다.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신앙심이 교육과 부정적인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교육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종교인이 될 가능성이 적다). 또 신앙심은 과학에 대한 관심과 부정적인 관계에 있으며 정치적 자유와도 마찬가지였다.(162쪽)
19세기를 산 《황금가지》의 저자 프레이저도 미개인에 대해 '미개인이니까 그런 거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이것은 19세기 학자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런데 21세기를 사는 그것도 과학자라는 인간이 이딴 이분법적인 사고를 한다고 생각하니 구역질이 난다. 미국인의 80%에 가까운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는다. 우리나라의 50%에 가까운 사람들은 종교를 믿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은 교육수준이 높고 미국인들은 교육수준이 낮아서 그러한가? 일본인들 대부분이 '신도'를 믿는다. 리처드 도킨스의 논리대로 하면 쪽발이 대부분은 미개해서 그런가보다. (이런 미친 논리가 세상에 어딨을까?)
셋째. 많은 종교인이 도덕의 척도를 종교(혹은 신)에서 찾는다고 한다. 누가? 어떤 종교인들이? 기독교인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도 양코배기들 이야기지 전체적으로 일반화할 수 없는 이야기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제자백가들에 의해 善·惡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해왔고, 그것은 종교와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야훼를 믿는 신자들이나 그럴 수도 있지, 타 종교에까지 그것을 일반화시킬 순 없다.
넷째. 도킨스는 종교 자체에 대해 적대감을 느끼고 종교 자체를 없애자고 한다. 종교 특히 기독교의 폐해가 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같이 기독교 신자가 전 인구의 80%에 육박하는 나라, 그리고 다른 셈족 종교를 믿는 국가에서나 해당하는 일이지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적용되지 힘든 문제라고 본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광신도들이 날뛰긴 하지만...) 나는 작가에게 이런 주장들은 셈족 종교를 믿는 나라에 가서 말하라고 하고 싶다.
종교는 인류가 두 발을 걷고 '생각'이란 것을 하면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이상은 종교는 영원히 인류와 함께할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에 대해 적대감을 표시하기보다는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도킨스의 대안은 없다. 단지 종교만 없어지면 된다는 식이다.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그런 면에서는 대안없는 도킨스의 주장은 허공에다 삽질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섯째. 책의 번역자는 우리는 도킨스에 비해 논리적으로 철저하게 따지지 않으며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적당히 넘어가곤 하니까 말이다. 뭐 이렇게 핏대 세우고 그래? 누군가 술을 따라주면서 도킨스에게 그렇게 말할 것도 같다. 어찌보면 그것이 동서양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그것이 바람직할까? 라고 책을 마친다.
전인구의 절반이 종교를 믿지 않고, 종교인구 중에서도 그 절반이 불교인 이 나라에서 '신이 이러쿵 저러쿵' '예수가 이러쿵 저러쿵'라고 비판하고 욕하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하고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느겠는가. 별 시덥지않는 종교에 일일이 말할 필요가 우리나라에서 꼭~~~ 필요한 일일까? 뭐가 잘못된 태도라는 것인가!! 아마 번역자는 자신이 한국사람이 아니라 '양코배기' 인걸로 착각하나 보다.
그다지 유쾌한 책도, 도움이 되는 책도 아니었다. 학술적인 책도 아니고, 재미로만 읽기엔 책 전반부에 머리아픈 용어들이 나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책이 되어버렸다. 거기다가 번역도 한 몫했다. (제발, 번역가들도 국어시험을 좀 봤으면 한다. 맞춤법에 자신이 없다면 최소한 맞춤법 검사기에 검사를 해 보든지, 아님 공부를 하든지…) 2009년 3월 29일
 코란을 읽기는 했는데, 추천을 하고 싶진 않다.
일반인들이 읽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한 종교의 경전이기 때문에 별 내용도 없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면 자신들의 포교활동을 위해서라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타 종교에 대한 아무런 배경지식따위도 없이, 다른 나라에서 포교하다간 총에 맞아 죽기 십상이다.)
같은 셈족계 종교이고 같은 유일신앙인데도, 이슬람교에서 예수를 단순 사도의 한 명으로 취급한다는 이유로 다른 종교처럼 취급하는데, 나 같은 무신론자들이 볼 땐 거기서 거기인 종교이다.
코란에서 크게 볼 내용은 없었다.
일반인들이라면 코란을 사서 보는 것보다 코란에 대해 잘 정리된 책과 코란을 함께 사서 참고용으로 보는 것은 좋을 것 같지만, 그냥 코란만 사서 읽기는 지루해서 힘들 것 같다.
코란은 마호메트가 계시를 받은 것(메카시절과 헤즈라이후 메디나시절)을 기록한 것인데, 시대순으로 편집된 것이 아니고 각 장의 길이에 의해 가장 긴 장부터 차례대로 편집 한 것이라 책에 대한 아무 정보 없이 읽기는 무리가 있다.
이슬람 쪽에서는 기독교의 <구약> → <신약> → <코란>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하는데, 코란을 잘 보면 <구약> → <신약> → <코란>보다는 <구약> → <코란> → <신약>이 더 어울린다고 본다.
기독교 경전을 한 번이라도 읽었다면 알겠지만, 구약의 '야훼'는 유대민족신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기독교신자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동일 선상에서 보면 <코란>에서의 '알라' 또한 <구약>에서의 야훼와 큰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이도교에 대한 태도를 보면 오히려 '알라' 쪽이 더 호전적으로 보일 정도로 민족신의 성격에서 벗어나 보이진 않는다(물론 이 분야에 대해 공부가 필요하겠지만)
여기서 더 깊이 이 책이 어떻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 보인다. 만약 이슬람교에 관심이 있다면 참고서적으로는 봐도 무난하겠지만, 이 책 전체를 다 읽어보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말리고 싶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나온 코란의 번역본은 두 종류로 알고 있다. 하나가 김용선 교수님께서 번역하는 '코란(꾸란)'이고, 다른 하나는 파하드국왕꾸란출판청에서 나온 '성 꾸란'이란 책이다. 예전에 '성 꾸란'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즈베키스탄 친구한테 빌려줬다가 못 받아서 이번에는 김용선 교수님의 '코란(꾸란)'을 사게 되었다.
'성 꾸란'은 한쪽 면은 우리말 번역으로 한쪽 면은 원문이 적혀 있고, 김용선 교수님의 번역본보다는 종교의 경전 냄새가 더 나는 편이다.
2009년 03월 22일
조류독감??? 새가 감기걸린건가??? 감기 걸린 새 먹으면 몸에 안 좋은 건가???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부끄러운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 사실이다. 작년 말, 아는 선생님께서 조류독감의 심각성에 대해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 그 생각에 이 책을 사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심각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이란 동물은 자신들이 다른 생물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같은 동물인데도, 우리를 만들어 가두고 먹기 위해 동물들을 기른다. 이런 인위적인 형태가 예전에는 없던 바이러스를 생산해내는 것이다.
저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정치인들의 오만함에 대해서도 비평을 서슴지 않는다.
주로 태국과 중국의 관료들이 등장하고, 미국의 오만할 뿐만 아니라 멍청하기 까지한 장관들과 행정관료들의 미친 작태에 대해서도 말을 한다.
미국에서의 이익집단과 정당과의 뒷 돈 거래에 대해서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국민의 생명이 달린 바이러스 백신 개발 분야에서도 백신 개발보다 기업의 이익을 보호해 주는 멍청한 짓거리들을 했고, 지금도 그런 미친 짓을 고치지 않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어이가 없을 뿐이다.
2009년 새해가 시작된 지 2달도 지나지 않았다.이미 중국에서는 조류독감 바이러스(H5N1)로 8명이 사망했고, 태국에서도 3명이 감염되었으며 캐나다에서는 저번 달 말 6만여 마리의 칠면조를 살처분했다. 뉴스를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바로 어제 울산에서 (인체감염이 낮은)저병원성 AI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 '한국콜마'에서 AI치료제 회사로 선정되어 항바이러스제 개발에 착수했다고 봤다.
과연 인간이 언제든지 H1N1(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전 세계적으로 5천만~1억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같이 살인병기가 될 수 있는 H5N1바이러스에 대해 얼마나 슬기롭게 대체할 수 있게 될지, 그 미래에 대해서도 나는 긍정적으로 보지 못하겠다. 2009년 2월 20일
 평소 경제학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터라 경제학책은 거의 등한시 하였다. (경제학책 뿐만 아니라 역사, 종교, 철학 분야 이외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올해 목표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보기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번에 읽은 장 지글러의 저서 다음으로 선택한 책이 경제학자가 쓴 빈곤문제에 관한 책이었다. 경제학자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숫자놀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통계수치란 불확실한 것이어서 흐름은 알 수 있어도 그것이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가져다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이강국 교수의 저서 또한 통계수치를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기 때문에 훌륭한 내용임에도 100%충족은 시키지 못한 것 같다. 현재 우리나라의 양극화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다. 그리고 이 양극화 현상은 점차 굳어져 가난은 대물림 되어갈 것 같고,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언제나 경제성장이 경제분배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으로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작은 파이를 나눠갖느니 파이를 크게 해서 나눠갖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파이를 크게 할수록 오히려 큰 파이 조각을 가진 쪽이 다른 쪽의 파이 조각을 빼앗아 자기 것을 더욱 부풀리는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이미 수백 년 반복되었던 일이다.
장 지글러의 저서에서 브라질 지주의 1%가 차지한 경작지가 브라질 전체 경작지의 40%가 넘는다는 말에 '못사는 나라라 그런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였는데, 이번 책에서 우리나라 상위1%가 차지하는 사유지가 전체 사유지의 51.5%를 차지한다는 말에 당혹스러움과 분노를 느꼈다.이
것은 이미 이승만때부터 잘못된 토지개혁으로 말미암아 친일세력들이 계속 부자가 되었고, 그들이 박정희 정권에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기생같이 붙어서 부가 세습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 윗세대에서는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이 있어, 공부를 열심히 하면 언제든 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IMF 위기로부터 노무현 정권을 거쳐 심해진 부의 양극화가 교육의 양극화로 이어져 없는 집에서와 있는 집 자식과의 교육 수준 차이 또한 좁혀지지 않는 사태가 되었다.
지금의 양극화가 해소되려면 혁명이 일어나서 나라를 뒤집거나(내 생각), 저자의 주장대로 현 제도에서 분배와 성장을 같이 이루는 수밖에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과연 이 정권과 그 다음 정권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수정하여 함께 사는 사회를 이룩할 것인가에는 부정적인 생각만 든다.
2009년 02월 10일
29년을 살면서 사회의 실상을 말해주는 이런류의 책에 대한 관심이 적었기 때문에 거의 접하질 않았다. 올해 사회학과 문명론에 대해 관심을 옮기기로 한 다음 첫 번째로 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전체적으로 충격적인 내용이라던가 하는 것은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실상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쓴지가 10년 전. 과연 2000년과 2009년의 상황은 나아졌을까?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에서 말한 구조적인 문제는 환경적인 문제보다 더 심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환경적인 문제도 간과할 순 없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재앙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재앙이기 때문에, 환경적인 재앙에 비해 그 크기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어차피 환경재앙 또한 인간이 만들어내므로 인재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지금 우리 대한민국을 봐도 그렇다. 며칠 전 일어난 용산 철거민 참사사건. 몇 명 되지도 않는 쓰레기 정치인들과 정신병자 같은 정책결정자들 때문에 몇천, 아니 몇만의 서울시민이 외각으로 쫓겨나가고 천막을 치고 살아가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보릿고개를 넘어 이제 겨우 먹고살 만한 시대가 와서, 이제는 적어도 입에는 풀칠하는 데 큰 지장이 없겠구나 하니까, 강제로 나가란다. 그런데도 국가는 방관하고 있다. 지자체장도 가만히 있다. 자기 임기 중에 뭔가 한 건 해 나가야 된다는 생각에 미친 짓을 하는 것이다.
사회 구조적인 부분 때문에 생긴 가난은 폭동이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바뀌기 어려울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굶어가는 아이들의 참상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 문득 스쳐가는 소설이 한 편 있었다. 일제강점기 우리들의 가난한 삶을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그려 읽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강경애 선생님의 《지하촌》이란 작품이다.
돈을 주지 못해 고칠 수 있는 병은 못 고쳐 병신이 돼버린 주인공과 그 가족들이 겪는 참상들. 그런데 소설 속에서만 봤던, 우리네 일제시절에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던 시절이 100년이 지난 세계, 그것까진 아니지만 三旬九食의 생활을 하는 대한민국의 가난한 아이들.
행동하는 양심은 아닐지라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인식하며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게 해 준 이 책의 저자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2009년 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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